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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11) 4. 고려와 조선의 갈림길(2)  머뭇거리며 건너는 강. 새 나라를 향해

입력 : 2020-01-28 02:40:56
수정 : 2020-01-28 02:41:36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11) 4. 고려와 조선의 갈림길(2) 

 

 머뭇거리며 건너는 강. 새 나라를 향해

 

▲ 가을, 임진나루

 

쓸쓸해라 결국에 누구에게 의탁하나, 거침없이 동서로 왔다 갔다 떠돌았네/ 구름과 산악이 정말로 좋구나, 세상에선 서로가 용납하지 않으니/ 구하역은 아득히 모습이 사라지고, 화악봉은 망망하게 시야에 잡히는구나/ 가다 말고 자꾸만 되돌아 보이니, 마상에 마음이 천근이나 무겁구나 (변계량. 새 도성에 가기 위해 새벽에 구하역에서 출발하였는데 임진의 도중에서)”

 

나라가 바뀌었다. 새 왕조는 도성을 한양으로 옮겼다. 도성의 경계였던 임진강은 그 지위를 잃었다. 대신에 고려와 조선 두 도성 사이 길목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임진강을 건너는 일은 새로운 나라에 참여하는 길이었다. 의리를 중시하는 학인들에게 이 길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출사할 것인가? 숨어들 것인가? 세상은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 변계량은 새 도성을 향하고 있다. 그는 개성에서 출발해 구화역을 지나고 있다. 임진강을 건넌다. 역이 아득해지고 개성은 그 너머로 사라진다. 고려를 버리고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화악이 시야에 잡힌다는 것은 앞길은 정해졌다는 뜻이다. 화악은 북한산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도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이 정도의 머뭇거림도 없다면 유학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 변명쯤은 해 두고 넘어가는 것이 왕을 바꿔 섬기는 자의 도리일 것이다. 고려를 버리고 출사한 선비들의 태도가 대체로 이렇다.

 

 

▲ 강가의 갈매기조차 왠지 모를 수심을 불러일으킨다. 머뭇거리며 새 나라에 참여한 유자들의 정서가 그랬다. 

 

권근은 충주에 머물다가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는 길에 불러내자 서울로 들어온다. 맹사성은 미래를 생각하라는 아버지의 종용에 마지못해 벼슬길에 오른다. 명재상 황희가 한때 두문불출하다가 주변의 권고로 출사했다는 두문동 이야기도 조선개국초기 유자들이 거쳐야 했던 머뭇거림의 통과의례를 보여준다.

변계량은 이 대열에 권근의 아우 권우를 끌어들인다. 둘은 젊은 시절부터 함께 공부하던 벗이었다. 변계량의 천거 때문인지 권우도 곧 조선왕조에 참여한다. 그들은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일로 바삐 돌아다닌다. 두 서울 사이 임진강을 발이 닳도록 건너다녔다. 조선은 개국 3년 만에 도성을 한양으로 옮기지만 1399년 개성으로 환도한다. 그리고 1405년 다시 한양으로 올 때까지 관료들은 신도와 구도를 수없이 오가야 했다.

갈대꽃 단풍잎 날 저문 강가에/ 두 척의 작은 배 빈번하게 오가는구나/ 모래밭의 백구는 그 누구와 친숙한가/ 해마다 행인들이 무척이나 수심하네 (변계량. 임진강 나루에서)”

가을 임진나루.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두 척의 배가 수시로 오간다. 그곳에서 느끼는 수심은 가늠이 어렵다. 갈대꽃, 가을, 저문 강은 이미 수심을 전제한다. 하지만 행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나루에서 홀로 시름에 젖는다는 것은 정경 밖의 또 다른 이유가 있을 법하다. 아마도 두 나라를 섬기는 유자로서의 근원적 회의와 새 왕조에서 부딪치는 난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 것이다. 권우도 다르지 않았다.

학문을 배운 보람이 어디 있는고. 시대를 바로잡기는 틀렸구나./ 십년의 명예와 이익도 하룻밤 꿈이었으니./ 가을비 부슬부슬 내리어 옛 역 터 쓸쓸하고/ 솔가지 불은 벽을 비추는데 쫓겨난 나그네의 마음은 어떠하리.(권우. 동파역에 자면서)”

동파역은 임진나루를 개성 쪽으로 넘으면 있는 곳이다. 가을에, 권우도 쓸쓸함에 싸여있다. 뜻을 펴려 했으나 정계에서 밀려난 현실에 대한 한탄이 주조를 이룬다. 미루어 고려를 버린 자의 가책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새 나라로 떠나왔으나 정작 이룬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 이때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겠다며 목숨을 내놓은, 꼿꼿한 정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절이기도 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에 대한 돌아봄 없이 새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배운 자의 자세일 수 없다. 머뭇거림, 그것은 조선개국에 동참한 유자들의 통과의례였다.”

 

 이재석 /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저자

 

#1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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